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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치료] 프로이트도 몰랐던 실존적 근원 4가지

by 강점멘토레오 2020. 4. 12.

 

실존을 깨달은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으면서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던 것들을 한 방에 설명해주는 통찰력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이는 가히 패러다임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주장은 다윈의 진화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맞먹는 서구 문명사의 3대 사건에 포함되며 20세기를 뒤 흔든 혁명가 니체와 마르크스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전해져오고 있다. 어떤 이는 예수와 아인슈타인에 비교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실존주의자로서 그를 평가하자면 그가 인간의 근원적 불안의 문턱에 손잡이를 잡았을 뿐 아직 그 문을 열고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하고 싶다. 프로이트가 주장한 인간 이해의 주요한 주장이 인간의 정신역동에서 특별하고 근원적인 부분에 접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무의식보다 더 근원적인 핵심 원형에 접근하지 못한 것이다. 과연 인간의 근원적인 정신역동은 무엇인가?

 

정신역동

 

인간의 근원적인 정신역동은 무엇인가?

 

프로이트는 인간 내부의 갈등 안에 있는 힘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 우리의 사고와 감정, 행동을 만들고 병리적 현상을 만든다고 생각했다. 이런 정신역동을 기초로 내부의 무의식과 의식의 힘, 동기 그리고 공포, 두려움을 찾아내 치료하는 것이다. 과연 내부 안에 발생하는 그 힘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 힘은 페르소나(가면)를 갖는다. 회피, 억압, 부정, 취소, 전이, 투사, 은폐 등 방어기제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정신분석의 주된 관심사다. 그래서 정신분석에서는 핵심 사고, 꿈의 해석, 어린 시절에 대한 회고적 연구 등을 통해 그 근원적인 힘에 접근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프로이트가 진화론에서 많은 부분을 착안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실제로 프로이트는 다윈주의자였던 카를 클라우스가 그의 교수였으며 의과대학을 택한 가장 큰 원인이 다윈의 '종의 기원'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본능적인 힘의 지배를 받는다는 인간관을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은 운명적으로 타고난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운명인 것이다. 인간이 본능적인 것은 타고난 폭력성과 성적 욕구의 만족이며 이것을 막는 세상과 갈등관계 속에 나타나는 인간의 병리를 정신분석으로 해석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주장은 사후 여러 위기를 맞지만 그의 계보를 잇는 신프로이트 학파는 정신역동의 범위를 넓혀갔다. 그들은 시대적 문화와 개인적 환경이 정신역동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다. 수용과 수락을 통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인간관계 속에서 성격구조가 결정된다고 믿었다. 인간이 안전을 통한 생존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진화론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정신역동의 실존적 근원 4가지

하지만 실존주의는 인간의 근원적인 갈등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갖는다. 인간 갈등의 근원의 문을 실존주의자들이 열어버린 것이다. 이를 가장 잘 이야기 한 실존주의자가 바로 사르트르이다. 그가 말한 "인간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을 주목하자. 인간 존재에 주어진 궁극적인 관심, 본질적인 고유성(Intrinsic Properties),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이 세상에서의 존재 속에서 속박된 나머지 우리의 실존을 잃었기에 근원적인 정신역동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 근원의 4가지는 죽음, 자유, 소외, 무의미이다.

 

뭉크는 근원적 인간의 정신역동을 그린 것일까?

 

죽음

이 4가지는 우리가 반드시 직면하게 되는 근원적인 두려움과 갈등이다. 우리는 언젠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라면 절대 도망갈 수 없는 현실이다. 우리는 이미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지만 인간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속에서 인간은 죽어서도 존재하려는 욕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존재 속에서 존속'하려는 것은 죽음에 대한 자각과 영생하고자 하는 원함 사이의 강력한 갈등이다. 이 갈등이 큰 사람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라 주장하며 신에게 선택받았고, 영생을 얻었다며 종교에 심취하기도 한다. 

 

자유

자유는 또 어떤가? 우리의 서사적 삶에서 자유는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실존적 의미에서 자유는 자신의 선택에 따른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은 죽음을 행해 달리는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선택한다. 이것은 막연하고, 무거운 근원적 갈등이다. 자신의 자유에 따른 책임을 지지 않는 자들이 대게 타인에 투사해 책임을 전가하고, 온갖 방어기제를 작동해 나의 책임을 타인에게 덮어 씌우고, 타인을 살해하기까지 한다. 심지어 자신의 죄를 예수님이 십자가에 대신 짊어졌다고 까지 말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빨간약과 파란 약을 준다. 어떠한 선택이든 우리의 선택이다. 운명을 선택했다면 그 운명에 따른 책임도 전적으로 서사시의 저자가 짊어져야 한다. 짊어지지 않기에 병리가 생기는 것이다.

 

소외

누군가 실존주의 공부하면 좋나요?라고 물었다. 나의 대답은 '아니요'였다.  안전한 상황을 불안전하게 만드는 것이며 편안함을 불편으로 만드는 것이 실존이라 답했다. 우리가 실존에 들어간다면 세상에 피투성으로 태어난 피투(Geworfenheit, 彼投)적인 존재이며 홀로 내일을 향해 기투(Entwurf, 企投)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피투와 기투를 반복하며 내 삶의 서사시를 써 내려가야 한다. 소외란 혼밥 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절대적인 소외의 자각을 피하기 위해 지금 얼마나 많은 병리적인 사태들이 생기고 있는가? SNS에서는 소외에 벗어나기 위한 발악들이 나타난다. 하다못해 군대에는 동반입대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동반자살을 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노인 자살률이 비정상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소외라는 인간 근원의 정신역동은 그만큼 두려운 것이다. 

 

무의미

마지막으로 무의미다. 아마 여기까지 글을 읽었다면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다. 인간 근원의 불안의 문에 들어왔음에도 물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 자유, 소외와 자신의 상관관계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럴 바에 TV를 틀어 재밌는 것을 보는 것이 차라리 낳을 것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위 3가지를 생각했다면 우리를 가득 메우는 것이 바로 공허함, 즉 무의미이다. 나도 한 때 태어나 무언가 큰 쓰임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도 청소년기를 겪으면서 과장된 자의식이 있었고, 개인적 우화(Personal Fable)를 통해 허구적인 자아 관념을 가졌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는 왜 살아가는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떠오르면서 사르트라가 말한 C를 Choice(선택), Challenge(도전), Create(창조)로 여겼지만 모두 부질없음을 깨달았을 때 과연 신이 있는 것인가? 딜레마에 빠지기도 했다.

 

인간의 과학이 최근 실존적 지능을 발견했다. 인간에게 실존 경향성이 있다는 진일보한 발견이다. "바람이 분다.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인과론은 우리의 지각으로 나타나는 기본적인 현상이다.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은 고전 물리학에서는 인간의 인과론적 사고를 통해 인간을 운명론적으로 해석해왔다. 하지만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양자역학을 통해 인간의 자유의지를 해석하려는 노력들이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인간은 기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내가 내일 출근을 하면 회사로 가겠지만 언젠가는 내가 발길이 가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는 실존주의자다. 

 

프로이트는 인간 근원의 정신역동에 발만 담근 것 같이 느껴진다. 인간 심연의 근원적 세계에 더 깊이 잠수했다면 무의식의 거대한 4가지 기둥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는 무의식을 발견했음에도 표면에 떠오른 거대한 빙하의 가장 밑바닥까지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아직 실존적 근원이자 실존적 정신역동 4가지를 완전하게 수용하거나 초월하지 못했다. 하루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죽어도 좋다는 말은 위의 4가지를 해탈했을 때 오는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앞으로 '문작가의 실존 수업'에서는 위 4가지라는 내면의 거침없는 풍랑 속에서 오히려 돛을 펴고 추진력을 얻어 4가지 관문을 통과해 초월적 실존의 세계로 나아가고 싶다. 세계 4대 성현이라는 예수, 석가모니, 공자, 마호메트가 보이지 않을까? 과연 성현들의 발끝만큼이라도 따라갈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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