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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코칭

지금당장, 단 하나 뿐인 인생의 서사를 써라

by 강점멘토레오 2020. 6. 29.

인생의 의미를 찾는 다양한 활동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가벼우면서 간단하면서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이 글을 쓰는 것이다. 어느 때는 미친 듯이 글을 쓰고 싶다가도 어떤 때는 너무 물려서 쳐다보기 싫을 때도 있다. 하지만 내 삶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내 삶에 대한 '배신'이라 여겨도 될 정도로 내 삶을 관통하기 위한 글쓰기는 정말 중요한 일이다. 

 

누군가 말했다. 저널리즘이 죽어간다고 말이다. 언론사의 기자들을 기레기라고 칭하며 저널리즘에 사형을 선고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과연 그럴까? 언론분야에 와서보니 일부 몰지각한 언론인 때문에 진정한 기자들까지 싸잡아 욕을 먹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세상을 보는 다른 관점과 용기로 집요하게 늘어지며 취재 끝에 사회적 통념을 관통하는 강력함이란 경외심이 느껴질 정도다. 나는 기자들을 '펜을 든 영웅'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우리는 착각한다. 글은 기사나 소설가가 쓰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저널리즘은 나 자신의 탐구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최근 유튜브를 통해 고양이를 키우며 콘텐츠로 촬영하는 사람들이 많다.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이것이 저널리즘이냐? 는 고민이 있다. 논란이 아니다. 앞으로 변화되는 세상에서 어디까지를 저널리즘으로 봐야 하냐는 하나의 이슈이다. 이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나의 의견은 '맞다'이다.  고양이를 키우는 것이 왜 저널리즘이냐고? 고양이에 대한 '존재'를 어떤 '존재자'가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실 그 고양이를 모른다. 어떻게 생겼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색깔인지? 어떤 버릇이 있는지 전혀 모른다. 그 고양이의 존재는 살아 있는 동안 존재하지만 유튜버 같은 '존재자'가 있지 않는 이상 우리가 그것이 '존재'한다고 알지 못한다. 존재자가 비로소 텍스트와 영상을 통해 이야기하고, 그것이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알려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다. 나라는 존재는 누가 존재적으로 만드는가?

 

사실 '나'라는 존재는 상당해 본질적으로 이야기된다. 나의 직업은 사회복지사이다. 나는 두 딸의 아빠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떤 학교를 졸업했다. 이런 타인과 세상과의 관계적인 나는 실존이 아닌 본질이다. 그것을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그 존재의 의미는 타인의 규범이나 가치에 따라 달라진다. 학벌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나를 만났다면 천하게 여길 수 있을 수 있다. 좋은 차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나의 차를 보고 나의 가치를 낮게 평가할 수 있다. 내 삶의 서사를 그들이 쓰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나 스스로 그 본질에 벗어난 나의 실존을 쓸 것인가?

 

앞서 고양이에 대해 글을 쓰고, 영상을 만드는 것을 저널리즘이라 평가했다. 나라는 존재를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나라는 존재자이다. 글을 쓰고, 방황하고, 고뇌하는 인간만이 실존적이라 말할 수 있다. 지금 당장 펜이나 컴퓨터를 열어 무엇이라도 끄적여라. 저널리즘이 죽었다는 말은 당신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저널리즘이 죽었다느니, 앞으로 신문이 없어질 것이라느니, 책이 없어질 것이라느니라는 말은 믿지 말길 바란다. 그런 헛소리 속에서 나의 서사를 담담하게 적어 내려가는 당신의 저널리즘이 죽어가고 있는지 돌이켜 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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