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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복하기

시험지에서 엄마가 튀어 나왔다.

by 강점멘토레오 2020. 11. 4.
안녕하세요. 실존멘토 문작가입니다. 실존적인 삶이란 자신을 소멸한 본질적인 삶에서 벗어나 세상 어디에도 없는 자기다움과 삶의 의미를 찾아 '미래가 되어가는 현재'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 불안의 코어(Core)라고 할 수 있는 죽음과 무의미, 소외, 자유를 넘어 당신의 실존을 깨우는 것이 저의 사명입니다. -작가의 말-

일탈을 할 경우 부모가 떠오를 수 밖에 없다. 부모를 배반했다는 원초적인 감정이 그들로부터 독립해야한다는 시초가 될 것이다.

 

지난 글을 통해 완벽주의자의 대부분이 '죄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에게 불안과 강박이라는 벌을 준다고 언급했다. 오늘 그 주제를 이어 B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죄의식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주양육자 '엄마'에 관한 이야기다. 이런 마을 하면 폐륜적이라 할 수 있지만 난 늘 그들 안의 부모를 죽이라고 말한다. 내 삶의 궤적에서 벗어나는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부모의 무서운 얼굴이 그려진다면 당장 그들을 내 마음의 집에서 쫓아내라. 그렇다고 진짜 부모를 부정하고, 싸우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내 마음의 밭에 뿌리 깊게 내려앉아 나의 모든 인지와 정서, 행동을 좌지우지하는 그 원형을 찾아 자아의 문 밖으로 배웅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실존적인 삶이다.

 

내 마음의 도청장치

늘 B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것이 있다. '엄마'라는 존재다. 어릴 적부터 늘 혼나면서 자라서인지 감정적으로 상당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그는 늘 엄마의 의견에 따라야 했으며 그의 말을 들어야 했다. 그래야 마음이 편안했고, 엄마가 시키는 데로 사는 것이 수월했다. 고등학생 때는 진로를 두고 고민했을 때 이미 엄마의 마음은 정해져 있었다. 그는 내심 그때 왜 엄마와 대차게 싸워보지 못했을까? 후회가 막심하단다. 그가 한 번은 죽고 싶다는 결심을 했다고 고백했다. 수능시험장에 들어가는 순간 엄마의 배웅을 뒤로한 발걸음은 너무나 무거웠단다. 그 순간부터 죄책감이 밀려왔을 것이다. 부모의 크나큰 기대가 있었지만 B는 열심히 하지 않았다. 수능을 잘 봐야 한다는 목표가 없었다. 엄마의 바람일 뿐 수능이 다가올수록 마음은 점점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 시험을 보는 시간에 그래도 공부한 부분을 풀어나갔지만 모르는 문제가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하자 불안감에 휩싸였다. 갑작스럽게 시험지에서 엄마의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그렇게 그는 첫 번째 시간부터 자신의 감정에 제대로 말린 것이다. 그렇게 시험을 보고 집 앞 현관문에서 한 없이 멈춰있었다고 한다. 잠시 뒤를 돌아 13층 아파트 난관에 기대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봤단다. 순간 뛰어내리고 싶다는 충동이 밀려왔다고 한다. 울컥 눈물이 쏟아졌고, 아무 말 없이 집을 들어가 자신의 방에서 적막한 시간을 보냈다고 회고했다. 

많은 것이 결정되어 태어나지만... 태어나도 많은 것을 결정해준다. 나만의 방향은 어디인가?

B는 그렇게 성적이 되는대로 진로를 정해 대학교에 입학했다. 이제 20대라는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지만 늘 불안의 연속이었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담배를 펴도 늘 마음이 무거웠다. 늘 엄마에게 죄지은 느낌에 젖어 살아갔다. 한 번은 대학교 근처 원룸에 사는 B의 집에 온 엄마와 처음으로 크게 싸웠다고 한다. 이래라저래라 하는 걱정이 이제는 무거운 짐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는 지금 30대 초반이다. 그렇게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갈등이 반복되고 있다. 그 속에서 엄마의 말에 그냥 "네" "네"를 하며 넘기는 것이 더 편하다는 것이 몸에 배였다. 엄마와 갈등을 만들면 그의 일상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에 도청장치가 있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자신을 훤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엄마가 원망스럽다고 했다.

 

기다려주지 못하는 부모 VS 자유의지의 자녀

나는 B에게 도청장치라 다행이라고 말했다. CCTV 수준인 사람들도 많다고 했다. 나는 B의 이야기를 적극 수용하며 유년시절부터 지금까지 그 모든 갈등을 겪으면서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고찰하는 것을 응원했다. 지난 글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정서적인 독립을 하는 시기는 50대가 되어야 한다. 부모가 죽어야 자식이라는 본질을 탈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이 죽어야 실존적인 삶을 얻는 것은 아니다. 부모와 경계선을 명확하게 긋고, 자유의지로 당신들이 만들어 놓은 자식이라는 틀 속에서 내가 언제까지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나의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부모와 절멸을 선언했을 정도다. 1년 동안 연락 없이 지냈다. 강력한 불안을 겪었고, 나의 정신과 육체적 DNA를 갈아엎는 격동의 시간을 겪었다. 하지만 그 태풍의 눈 속에서 나의 실존을 볼 수 있었다. 모든 부모가 현명하지 않다. 자식을 소유물로 여기거나 경제적인 이유로 기다려주지 못하고 방향을 설정하고 채찍질한다. 현명한 부모는 자녀의 실존적인 삶을 위해 하나의 인격체로 본다. 필자가 연구 중인 실존 육아의 한 부분을 이야기하자면 어릴 적부터 하나의 자유로운 실존적 존재로 자녀를 키운 자녀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수용하고, 자신이 선택한 모든 것에 책임을 지는 아이로 자란다. 지금 나의 두 딸들에게 실존 육아를 대입하고 있다. 나는 아이들의 뒤를 따를 뿐이지 앞에서 끌고 가지 않는다. 나는 B에게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면 먼저 경제적이고, 정서적인 독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돈이 없어도 부모에게 구걸하지 않을 정도로 경제적 자립이 필요하고, 그 삶에 책임을 지는 자유의지로 살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나도 힘든 자립을 회피하기 위해 본질적으로 살아간다. 우리 스스로를 증명해내야 하는 것이다. 아주 외롭고, 힘든 고행의 길이다. 모든 것은 B의 결단에 달려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조차도 그 길이 너무나도 힘들고, 두렵다. 

전쟁의 역사 속에는 '해방'이 있었다. 본질에서의 해방을 위해 전쟁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노예와 다를 바 없다. 

실제적으로 우리나라의 애착육아는 우수하다. 하지만 이렇게 어두운 면도 있다. 애착의 깊이와 정도의 수준에 따라 부정적인 방향으로 갈 경우 힘든 삶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부모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양육의 종착지는 자녀의 '독립'이며 자녀의 의무는 자신의 삶에 '자유의지'를 찾는 것이다. 지금 당신의 행동이 무의식에 따라서 이루어진다고 믿을 것이다. 하지만 자문해보자. "누구의 무의식인가?" 부모에게 물려받은 DNA와 결정되어 있는 삶의 모든 것들 저항하는 B와 같이 자신의 자유의지에 도달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몇이나 될 것인가? 부모의 속박으로 벗어나 실존적인 삶을 실현할 수 있는 이유는 '자유'를 획득하느냐? 하지 못하느냐? 에 달렸다.  사르트르는 책임감을 가진다는 것은 어떤 일이나 사물의 명백한 저자(authorship)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B에게 당부했다. 제발 어떤 삶의 책임을 부모에게 전가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럴 경우 최악의 결말을 불러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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